올봄은 유난히도 호들갑스럽게 찾아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경상도와 동해안에 때늦은 폭설이 내렸다. 다행히도 이곳은 폭설이 비켜 갔지만 꽃샘추위를 조금 더 견뎌야 했다. 얼굴을 빼꼼히 쳐들었던 새싹과 꽃잎들이 놀란 가슴을 움켜쥐고 다시 숨어버렸다. 봄꽃 축제를 준비 중이던 자치단체는 손가락 날짜 계산을 부단히도 해댔다. 봄은 그렇게 찾아왔다. 산천에 봄이 왔건만 우리네 일상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으스스 더 추워지고 심지어는 오한이 날 지경이다. 어찌 된 일인지 매사가 꼬여만 가고, 살기는 더 힘들어지는 세상이 되었다. 그 스산한 기운은 나라 안팎에서 꾸역꾸역 밀려들어 오고 있다. 

# 일상을 옥죄는 시련들
흔히들 패륜적 행동을 하는 사람이나 사회적으로 못된 짓을 서슴지 않는 사람을 일컬어 ‘네가 사람이냐?’라고 한다. 이 한 마디면 집안이나 동네에서 사람 취급을 안 하겠다는 최후통첩인 셈이다. 하지만 요즘은 한술 더 뜬다. 여기저기서 “이게 나라냐?”는 원망의 목소리가 하늘을 찌른다. 분명 나라가 나라다운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무서움을 넘어 절망과 절규에 가깝다.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는 수많은 외침을 겪으면서도 처절한 희생, 은근과 끈기로 국난을 극복하고 슬기롭게 대처해 왔다. 은근은 한민족의 아름다움이요, 끈기는 한민족의 강력한 힘이 되었다. 백성은 이 숱한 난관을 극복해 가면서도 임금을 원망하거나 위정자를 질책하지 않았다. 다만 군주를 잘 보필하지 못한 불충이 죄스러울 뿐이었다.  
지난해 12월 3일,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하얗게 지워져 가던 비상계엄 발포는 역사의 퇴행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그 결과 세계 유수의 언론사들은 한국 민주주의의 허상을 신속히 타전했고, 국제적인 신인도는 끝없이 추락했다. 이 혼란을 수습해야 할 정치권은 정파적인 이해득실을 따지면서 나라의 안위와 국민의 일상은 안중에도 없었다. 여기에 경제는 더 요동을 쳤다. 경기 불황으로 인해 주식은 곤두박질치고 금값은 천정부지로 올랐다. 여기에 비행기 사고, 전투기 민가 오폭 등 많은 사고가 발생했고, 경제는 내수든 수출이든 모두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 설상가상으로 경상도 지역의 대형 산불은 민심을 더 오므라들게 했다. 무서운 기세로 덤벼드는 화마에 천년 가람이 하얗게 무너져 내리고, 민가와 축사는 앙상하게 볼품없는 뼈대만 남았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 어른거리는 혼돈의 정치권
정치권은 극심한 국정운영의 혼란과 정파적 갈등에 빠져 헤어 나올 기미가 없다. 국민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갈 정치 지도자의 부재와 불확실한 정치 상황으로 인해 혼란스럽다. 국회의원은 걸어 다니는 헌법기관이다. 하지만 국회는 국정운영의 갈등을 부추기거나 사법부에 그 기능을 떠넘기는 기관이 되어버렸다. 이 모든 게 정치의 사법화 현상, 적대와 배제의 정치, 그리고 무능한 정치 리더십이 만들어 낸 결과다. 국회의원은 독립기관의 권한은 물론 모든 의사결정 과정에서 국정의 비전과 소신에 의한 표결을 함으로써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언제부턴가 정당의 거수기로 전락하고, 정파적 이해관계에 매몰되어 버리는 실망을 안겨줬다.   

헌법재판소는 1987년 민주화의 결실로 태어난 헌법기관이다. 그동안 초헌법적 독립기관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해 왔다. 견제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으로 성장해 왔다. 상급심이 없는 단심제로 선고 결정을 내리면 더는 이의제기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금은 갈등과 불신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물론 재판관의 구성에 따른 문제점도 있다. 총 9명의 재판관을 삼권분립 기관인 대통령과 국회 그리고 대법원이 각각 3명씩 추천하는 구조이다. 따라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부침을 거듭하곤 했다. 탄핵사태를 슬기롭고 재빠르게 마무리해야 할 헌법재판소는 게으름뱅이가 되어 버렸다. 한덕수 부총리의 탄핵안은 기각 결정되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안은 언제 선고기일이 잡힐지 오리무중이다. 진보성향의 민주변호사모임은 변호사대회를 열어 “헌법재판소의 선고 지연은 그 자체로 부정의”라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미국으로 가 보자. 위대한 미국(MAGA)을 외치며 트럼프는 당당히 미국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다시 등장한 트럼프는 노골적인 미국 우선주의 정책과 관세전쟁으로 기존의 세게 질서를 뒤흔들고 있다. 트럼프는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되는 듯이 절대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외교는 물론 통상협상도 미국 일방주의 속에서 안하무인이다. 미국은 교과서에서 배웠던 세계 군사경찰의 지위와 역할은 이제 더는 찾아볼 수가 없을 것 같다. 치졸한 무뢰배 또는 뒷골목의 장사치로 전락해 버렸다. 뉴욕타임즈는 ‘많은 중국인이 트럼프 정부의 모습에서 문화혁명을 떠올리고 일론 머스크의 행동을 보면서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과 비교한다’라고 소름 끼치는 비아냥을 쏟아냈다.

미국의 대학교수 피터 터친은 그의 저서 ‘국가는 어떻게 무너지는가?’에서 미국 공화당은 극우 포퓰리즘을 신봉하는 진정한 혁명 정당으로 가는 중이라고 진단했다. 미국 구민들에게 트럼프 대통령을 안겨 준, 그리고 미국을 국가 와해의 벼랑 끝으로 밀어붙인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회적 힘은 엘리트의 과잉생산과 대중의 궁핍화에 있다고 봤다. 엘리트들 사이의 충돌, 광범위하고 매서운 대중 불만의 방향을 돌린 능력이 결합한 덕분이라고 풀이했다. 

얼마 전 유럽의 2개 기관에서 각국의 민주주의 지수를 발표한 보도를 접한 적이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이 발표한 민주주의 지수에서 우리나라는 4년 연속 포함됐던 ‘완전한 민주주의’에서 미국과 같은 수준인 ‘결함 있는 민주주의’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특히 윤 대통령의 12·3 계엄을 언급하면서 “한국 정치의 특징인 양극화가 정치적 폭력과 사회 불안을 증폭시킬 위험이 있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스웨덴 예테보리대학교의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가 발표한 보고서에서도 우리나라는 ‘독재화가 진행 중인 국가’로 분류되었다는 것이다. 

# 지역감정과 이념 대립의 망령
 어쩌다가 우리나라의 정치가 혐오와 불신의 대상이 되었을까? 필자의 견해로는 영호남을 갈라치게 하는 지역감정과 밥 한 끼보다도 못한 이념의 장벽을 드리운 진보와 보수의 갈등과 대립이 실마리를 제공했다고 본다. 이를 슬기롭게 극복하지 않고는 우리나라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최초의 지역감정은 지난 71년 대통령 선거를 시작으로 보는 것이 정치권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광복 이후 해방정국에서도 남북 간의 갈등은 있어도 동서 간의 지역감정은 없었다. 당시의 정치지형은 ‘여촌야도(與村野都)’로 여당은 농촌이 유리했고, 야당은 도시가 유리한 선거 구도였다. 박정희와 김대중이 맞붙은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선거판의 여우’ ‘마타도어(흑색선전)의 귀재’ ‘선거전략의 귀재’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달고 등장한 엄창록이 화려하게 등장한다. 대통령 선거 유세가 한창이던 대구의 길거리에 두 장의 벽보가 붙었다. 호남향후회 명의로 된 벽보 내용은 ‘호남인이여 단결하라’. ‘호남인에게 몰표를 주자’였다. 분명 흑색선전을 위한 엄창록의 전략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경상도 정권을 지켜야 한다는 영남권의 단결된 힘은 서서히 지역감정으로 번져 나갔다. 정치판을 좌지우지했던 지역감정은 3김을 정점을 지나면서 서서히 녹아드는 듯했다. 하지만 유독 선거 때만 되면 또다시 망령으로 되살아나곤 했다. 지역감정을 잉태한 지 환갑이 다 되는 데도 이를 해소해야 할 정치권은 현실에 안주하고 더 나아가 단물을 빨아 먹고 있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이 웃지 못할 현실이다. 

글로벌 사회에서 사상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흔히들 사람들의 생각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한다. 보수와 진보 그리고 중도가 그것이다. 보수는 전통적인 규범사회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해 나가는 사회적 지도층으로, 진보는 현실 안주보다는 이를 더 나은 방향으로 미래를 개척하려는 활동계층으로 대변된다. 나머지 하나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층을 일컫는다. 하지만 정치권에서는 이념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게 펼쳐 보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극우와 극좌로 대변되는 적극적인 정치활동 계층이다. 이들의 정치활동은 매우 큰 위험 요인을 내포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을 기반으로 하는 정권이 정상적인 민의를 수렴하기보다는 일부 강경세력의 입맛에 맞는 특정 정치색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파시즘은 동전의 양면일 수 있다. 그만큼 외부적인 환경에 취약한 구조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1930년대 파시즘과 일부 과격계층이 움직이는 대중독재의 가장 큰 공통점은 밑으로부터의 지지를 권력의 기반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이래저래 21세기의 민주주의가 1930년대 파시즘이 날뛰던 시절로 후퇴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 날자, 한 번 더 날자
소상공인들은 지금의 경제 사정이 환란보다도 더 어렵다고 아우성친다. 마치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을 그대로 닮아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 어떻게 이룩하고 지켜낸 국가이고 민족인가? 세계의 모든 시선이 존경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자랑스러운 코리아가 아니던가? 이제 누군가는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야 한다. 광장은 증오와 불복의 함성으로 뒤덮여 있다. 초현실적인 역사의 퇴행을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첫 번째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다. 대통령은 국가 원수로서, 국민의 안녕과 질서를 책임져야 한다.  결자해지 차원에서 탄핵 선고 결과에 대한 무조건 승복을 국민 앞에 천명해야 한다. 이재명 대표도 이에 상응하는 살을 저미는 결기를 보여줘야 한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다. 국가 지도자로서 미래비전을 제세해 국민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 대통령 탄핵소추 선고기일은 곧 치러질 것이다. 우리 사회에 암울하게 드려졌던 불확실성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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