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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3일 느닷없이 내려졌던 비상계엄, 두 달 반이 지났지만 아직도 두근거리는 가슴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밤 11시 48분, 일단의 군인들이 굉음을 내는 헬기를 타고 국회로 몰려들었다. 복장이 특이했다. 검은색 군복에 국방색 배낭을 메고 얼굴은 대부분 가리고 야간투시경이 달린 헬멧을 쓴 생소한 모습이었다. 딱 보아도 특수전에 투입되어야 할 공수부대원들이었다. 국회 현관을 지키는 시민들 때문에 내부로 진입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일부가 옆으로 돌아가 창문을 깨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으나 역시 국회의원 보좌관과 국회 직원들에게 막혀 본회의장으로 진입하지 못했다. 4일 오전 1시, 국회의원 190명이 본회의장에서 비상계엄 해제 결의안을 통과시키자 공수부대원들은 자취를 감췄다.
45년 전 참상 되살린 12·3계엄
그러나 필자의 걱정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2차 진입이 있을 것만 같았다. 45년 전 5·18의 악몽 때문이었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1980년 5월 18일 오후, 광주의 중심지 금남로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은 경찰봉보다 더 긴 투박한 진압봉을 휘두르며 청년들을 무차별 구타하고 연행하기 시작했다. 어떤 공수부대원은 착검한 소총으로 시민들을 위협했고, 대검을 던지기도 했다. 언론은 아무런 보도도 하지 않았다. ‘통행금지 시간이 앞당겨졌다’는 기사만 실렸다. 보도검열 때문이었다. 그러나 눈과 입을 통해 공수부대의 만행이 알려지자 19일부터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러자 끝내 집단 발포를 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강·온 진압했던 ‘광주’
필자는 갑자기 온순해졌다가 다시 강경 진압에 나섰던 공수부대의 모습을 지켜보았었기에 국회 본관에서 그들이 갑자기 사라진 것을 보고서도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을까라는 불안감이 들었다. 공수부대원들이 마음만 먹으면 현관을 지키고 있는 민간인들을 제압하는 것은 그들의 능력으로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새벽 4시 넘어 대통령이 계엄 해제를 발표하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국회에 투입된 군인들은 특수전사령부(특전사)의 지휘를 받는 707특임단이었다. 생소한 명칭이었지만 ‘참수(斬首)부대’로 불리었던 우리나라에서 최강, 최정예 특공부대였다. 그런데 얼마나 강력한 적(敵)들이 국회에 있었길래 이 부대에 출동명령을 내려 노출시킨 것일까. 비상계엄이 성공했더라면 그 후로 벌어질 모습을 상상해 보면 아찔하다.
특전사 이미지 ‘물거품’
특전사는 적진 깊숙이 침투해 게릴라전을 펼치거나 수색·정찰, 첩보 활동, 요인 암살 및 납치, 인질 구출, 주요시설 폭파 등 비정규전을 수행한다. 적의 게릴라부대가 침투해 오면 소탕 작전을 주도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58년 제1공수여단이 창설된 이래 현재 6개 공수여단이 있다. 그동안 벌어진 대간첩작전에서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런데 권력자들이 지난날 권력유지를 위해 비정규전이 주임무인 특전사를 사병(私兵)부리듯 하면서 그 역사를 더럽혀왔다. 1979년 10월 부마사태때 투입한 것을 시작으로 1980년에는 광주에 3개 여단을 투입했고, 2016년 박근혜 탄핵 때도 미수에 그치긴 했으나 계엄계획의 주력부대가 됐다. 이번에 다시 국회의원을 끌어내는데 동원돼 권력자의 하수인이라는 오명을 둘러쓰고 말았다. 과거에 대한 반성으로 대민봉사에 적극 나서면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확보해 오던 중이었는데 12·3계엄사태에 동원되는 바람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부하들 보호하려 사령관은 ‘진실고백’
다행스러운 것은 이번 공수부대의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는 점이다. 첫째, 과격한 진압 작전이 없었다는 점이다. 45년 전 공수부대는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까지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지시에 따라 출동하긴 했으나 이성적으로 움직였다. 많은 대원이 ‘자괴감을 느꼈다’고 했다.
둘째, 비상계엄으로 동원된 많은 지휘관 가운데 사과를 하거나 진실을 밝히는 데 앞장선 사람은 공수부대밖에 없었다. 곽종근 당시 특전사령관이 일관되게 대통령이 “끄집어내라”고 했다고 증언했고, 자수서를 작성해 검찰에 제출했다. 뒤늦게나마 다른 사령관들과는 달리 ‘참군인’으로 돌아온 것이다. 김태현 707특임단장도 국민에게 사과하면서 모든 책임은 부대를 지휘한 자신에게 있다고 했다. 이렇게 특전사만 유별나게 사과나 반성을 했던 것은 45년 전 광주의 과오를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해 윤석열 대통령은 체포영장과 구속영장을 거부하고 철조망을 둘러친 대통령 관저에서 47일간을 버티다가 사실상 끌려 나왔다. 또 탄핵심판을 받으면서도 “야당에게 겁만 주려고 비상계엄을 내렸다가 빠른 시간 내에 취소했으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겁만 주려고 했는데 참수부대를 국회에 보냈다? 그 자체부터 ‘내란’을 감추려는 모순의 시작이었다. 변명으로 일관했다.
전두환 감형 안 했다면 윤석열도 동원 못 했을 것
북한이 특수전 부대 20만명을 보유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우리에게도 특수전부대는 필요하다. 그러나 권력자들이 특전사를 함부로 동원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전쟁이나 대규모 비정규전이 벌어지지 않는 상황에서는 특전사를 동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법령에 못박아야 한다. 1980년에도 정규군 동원은 한미연합사의 승인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이를 피하려고 비정규전 부대인 공수부대를 동원했다. 이번에 707특임단 대원들은 목적지도 모른 채 출동했다. 평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비장한 각오로 나섰을 텐데 의외로 국회였다. 앞으로는 정확한 임무가 부여되지 않는 한 출동해서는 안 된다.
둘째, 특전사를 포함한 방첩사, 정보사 등 특수부대 인원을 동원한 군사적 행동이 법률에 위반되면 책임자에 대해서는 내란죄로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하고 감형이 없도록 해야 한다. 만약 전두환이 감형 없이 무기징역을 살았더라면 윤석열도 감히 공수부대 동원을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특별사면으로 그를 풀어주는 바람에 12·3계엄사태가 되풀이된 것이다.
셋째, 특전사 부대의 전투·정훈교육도 혁신해야 한다. 1980년 5·18이 일어나기 전, 공수부대원들은 부대 내에서 질리도록 시위 진압 훈련을 했다. 권력자들이 특전사를 이런 용도로 활용할 작정을 했던 것이다. 이후 광주에 투입된 것을 자랑하는 군인도 있었다. 반면 부작용도 컸다.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은 한 방송에 출연해 자신이 1980년대 707부대 중대장을 맡고 있을 때 광주에 투입됐던 하사관이 오랫동안 5·18트라우마로 고통받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12·3계엄사태 이후 정치적 이용물이 된 것에 실망해 퇴직하는 부사관이 크게 늘고 있다는 보도도 있었다. 공들여 키워둔 정예병들이 군을 떠나는 것에 대해서도 윤석열은 책임져야 한다.
곽종근, 죄 달게 받고‘역사의 증인’돼야
곽종근 당시 특전사령관과 공수부대 지휘관들은 스스로 밝혔던 것처럼 지휘관으로서 책임을 지고 죄를 달게받아야 한다. 아무리 대통령의 명령이었다고 하더라도 지난 역사에서 보았듯이 ‘내란’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전사가 더 이상 정치에 이용되지 않도록 하는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군인정신이다. 국민들은 국회의원을 무장공비로 여긴 윤석열과 비교해 누가 도덕적, 정신적으로 우위라고 평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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